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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 14회: 다시 잡혀온 날 - 두 번째 대기통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15회: 먼지 위의 글자 - 대기통에서의 공부
가려워도 긁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긁으면 금방 들킨다. 들키면 구령이 날아온다. "손!" "정지!" "기합!" 방장의 목소리는 짧고, 정확했다. 짧고 정확한 것들이 사람을 더 빨리 무너뜨린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도, 아주 얇은 틈이 있었다. 밤 점호가 끝나고 모두가 이불을 뒤집어쓸 때, 나는 침대 모서리의 먼지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ㄱ, ㄴ, ㄷ. 그리고 내 이름의 마지막 획. 상담실에서 틀어진 그 끝글자를, 내가 아는 모양대로 천천히 그려 넣었다. 누군가 코를 골면, 나는 글자를 지웠다. 아무도 못 보게. 다음 밤엔 다시 썼다. 그것이 내 하루의 과제였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 누구도 채점하지 않는 복수.
어느 비 오던 밤, 방장에게 잡혀온 아이가 울음을 삼키다 끝내 구역질을 했다. 암모니아 냄새가 한순간 방 안 공기를 바꿨다. 그때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귀에 종소리가 짧게 울렸다. 교문 옆 구령대의 소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는 종소리였다. 시작을 알리는, 아주 작은 종.
나는 알았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몸을 숨기고 마음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숨기고 글자를 내어오는 일이라는 걸. 이름의 끝획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까지, 매일 밤 먼지 위에서 손가락으로 시작하면 된다는 걸.
대기통의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의 구령과 몽둥이가 지워버릴 수 없는 것. 내가 스스로 쓰는 글자, 그리고 그 글자가 만드는 나. 그 얇은 것들이, 내일을 버틸 만큼의 두께로 자라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두 번째 '통'으로 옮겨간 뒤, 공기부터 달랐다.

점호 줄이 조금 느슨해졌고, 운동장 끝 철봉 옆에선 아이들이 잠깐씩 공을 찼다. 낮이면 낡은 교실 문이 반쯤 열렸고, 누군가 분필을 쓸어 올리는 소리가 복도에 얇게 흘렀다. 정식 학교는 아니었다. 주말마다 온다는 '선생님'들이 번갈아 들어와 산수, 받아쓰기, 동화 읽기를 돌아가며 가르쳤다. 출석부도, 반 번호도 없었다. 앉고 싶은 아이는 앉았고, 싫증이 나면 슬리퍼를 끌며 조용히 나갔다.
나도 여러 번 그랬다. 오래 앉아 있으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져서, 교실 밖의 먼지 냄새와 자유로운 바람 쪽으로 발이 자꾸 기울었다.
그때 가까이 지내던 아이가 하나 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위, 덩치가 크고 동작이 느린 아이. 무게 중심이 늘 약간 뒤로 젖혀져 있는 듯했고, 웃을 땐 눈이 먼저 반달이 됐다. 어느 날 그 애가 가느다란 플라스틱 원통을 들고 와 구멍을 몇 개 뚫더니, 피리처럼 불었다. 어눌한 손끝에서, 이상하게 또렷한 음이 나왔다. 높은 '미'에서 낮은 '도'로 미끄러지며, 운동장 먼지 위로 선이 하나 그어지는 느낌.
다음 회차 예고|〈16화: 소년의 집 – 정식 국민학교 설립〉
간판이 바뀌고 종이 울린 날, 나는 남기로 했다.
한 장의 인가 도장은 내 내일을 어디까지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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