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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21회: 첫 콩쿠르 - 3등의 의미

by realstorybook 2025. 11. 6.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1회: 첫 콩쿠르 - 3등의 의미

대회 당일, 교육위원회 주최라는 현수막 아래로 아이들이 모였다. 대기실은 악보 넘기는 소리와 A음 튜닝이 얇게 뒤엉켜 있었다. 누군가는 빠른 패시지를 질주했고, 누군가는 느린 음 하나를 오래 붙들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잘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한참 더 단단했다. 순간,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이제 겨우 2년 차인데….'
그때 선생님의 짧은 말이 떠올랐다. "좋은 소리." 나는 속으로 한 줄 더 보탰다. '올해는 배운다. 내년엔 이긴다.' 그 생각이 이상하리만큼 어깨를 펴 줬다.


차례가 왔다. 무대 뒤 커튼을 젖히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명이 눈앞을 얇게 지웠다 돌아왔다. 피아노와 눈을 맞추고 활을 올렸다. 헨델. 첫 음을 바닥 깊숙이 박아 넣듯 눌렀다. 급하지 않게, 문장 사이 공기를 정리하면서. 2악장에선 비브라토를 얕게 펼쳐 음과 음의 체온을 맞췄다. 심장이 빨랐지만, 소리는 덜 흔들렸다.

 

21회_무대_헨델첫음.jpg

모차르트. 도입의 밝음이 반짝이며 올라왔다. 활은 가볍게, 손목은 짧게. 빠른 패시지는 '분리 연습'의 순서로 건넜다. 활, 왼손, 연결. 무대 위에서도 그 질서가 유지됐다. 한 번 흔들리려던 구간에서 팔꿈치를 낮게 잡으니 활끝이 다시 수평을 찾았다. 마지막 카덴차를 넘는 동안, 대기실에서 들었던 다른 아이들의 소리가 잠깐 멀어졌다. 내 소리만 남았다. 끝 음이 홀 안에서 둥글게 사그라질 때, 나는 활을 늦게 내렸다.


무대 밖으로 걸어 나오며 귀가 천천히 돌아왔다. 심장이 뒤늦게 쿵 내려앉았다.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년엔 더 멀리 가자." 그 말이 결과 발표보다 먼저 와 닿았다.


시상에서 내 이름이 3등으로 불렸다. 환호 대신, 조용한 숨이 먼저 나왔다. 자랑스러움과 아쉬움이 절반씩 섞인 맛. 상장을 두 손으로 받는 순간,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차갑게 스쳤다. 그 냉기가 이상하게도 약속처럼 느껴졌다. '내년엔, 여길 넘어선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부산의 불빛이 흘렀다. 바다는 멀리, 소리 없이 어둡게 누워 있었다. 그 어둠 위에 줄 한 줄 긋듯, 나는 마음속으로 활을 들어 올렸다. 헨델의 첫 음, 모차르트의 첫 주제, 그리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다음 곡의 첫 마디. 올해는 배웠다. 내년엔 이긴다. 그 문장을 가슴속에 여러 번 되뇌며, 나는 상장 모서리를 가볍게 쥐었다. 종이의 각이 손끝을 조금 아프게 눌렀다. 좋은 소리로 이기는 법. 그 약속의 감각이었다.

 

단체생활은 시간을 칼로 자르는 일이었다. 바이올린을 더 붙들고 싶어도, 연습은 특활 시간과 저녁 전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종이 치면 합주실 문이 열리고, 종이 한 번 더 치면 불이 꺼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잠깐의 휴식. 그 뒤로는 기숙사 전체가 공부 시간으로 묶였다. 하루에 활을 제대로 긋는 시간은 길면 1시간 반, 많아야 2시간. 나머지는 손끝으로만, 머릿속으로만 켤 수 있었다.

 

다음 회차 예고|〈22회: 빡빡한 시간표 – 고등학교 입학〉
새벽 20분의 합주실과 낮의 기계 제도, 두 선 위에서 하루가 굴러간다.
나는 어떻게 기계의 선과 활의 선 사이에서 소리를 지켜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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