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2회: 빡빡한 시간표 - 고등학교 입학
그래도 나는 밤을 최대한 쪼개 썼다. 복도 창가에 등을 대고 서서, 연필을 활처럼 쥐고 보잉의 각도를 따라 그렸다. 1지, 2지, 3지… 손가락 운지는 책상 모서리에서 조용히 오갔다. 형광등의 백색 소음, 먼지의 느린 춤, 멀리서 들려오는 경비실 벽시계의 '째깍'. 그 틈마다 나는 악보의 쉼표를 떠올렸다. 소리 없는 연습.
얼마 뒤, '엄마' 수녀님이 내 눈 밑 그림자를 보셨는지 작은 허락을 내주셨다. "아침 기상 종 전에 20분, 합주실 문 열어 줄게." 그 말은 문 하나를 더 여는 열쇠였다. 이른 새벽, 창이 막 밝아오는 합주실에서 튜닝 A를 길게 붙잡으면, 빈 교실의 공기가 내 호흡에 맞춰 정리됐다. 그 20분이 하루를 지탱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자 완전히 다른 시간표가 펼쳐졌다. 캠퍼스 안의 공업고등학교. 정식 인가, 기능사 자격을 따서 사회로 나가게 하는 목표의 학교. 기계제도, 밀링, 선반, 용접… 칠판엔 도면 선이 그어지고, 실습실에선 금속 냄새와 기름 냄새가 뒤섞였다. 음악과는 한참 멀어 보였다.
그런데 이 학교가 가톨릭 재단이라 매주 일요일 미사가 있었다. 성가 반주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나는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강당의 마룻바닥 냄새, 향로의 얇은 연기, 성가 번호판의 나무결. A음을 맞추면, 금속의 차가운 아침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순간부터 내 고등학교는 '기계의 선'과 '활의 선' 위에서 동시에 굴러가기 시작했다.
담당 선생님은 늘 짧게 말했다. "이번엔 무대에서 배워라. 콩쿠르 나가자." 중3 때의 나와 달리, 고1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연습은 더 길고 깊어졌고, 곡은 점점 어려워졌으며, 소리는 차츰 맑아졌다. 무대 위의 떨림을 어떻게 숨으로 바꾸는지, 활의 무게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손목의 탄력을 어떻게 되돌릴지. 몸이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해부터 나간 대회마다 1등을 휩쓸었다. 어떤 대회에서는 1등 위의 특상을 받았다. 아마 부산교육위원회 주최였을 것이다. 이름이 불리면 상장을 받는 손바닥에 차가운 모서리가 닿았다. 그 감각이 약속처럼 남았다. "다음에도 이 소리로 가자."
학교 축제가 열리면 무대가 내 자리였다. 강당의 조명이 뜨겁게 이마를 덮고, 피아노의 첫 화음이 바닥에서 올라오면, 나는 한 음을 길게 그었다.

끝 음이 천장에 닿아 사그라질 때, 박수 사이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인기가 생겼다. 여학생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부끄러워서, 아니 그 순간만큼은 소리가 먼저였기 때문에.
그렇게 최고의 한 해, 고1이 지나갔다. 실습실에서 제도판 위에 선을 긋고, 저녁이면 강당에서 활을 그었다. 낮엔 자와 컴퍼스, 밤엔 활과 보잉. 서로 다른 도구가 내 손에 같은 확신을 남겼다. 정확한 각도, 올바른 압력, 망설임 없는 선.
다음 회차 예고|〈23회: KBS 교향악단 광고 – 운명의 게시판〉
생활관 게시판의 신문 광고 한 장—길이 직선이 된다.
그러나 학교의 한 마디, “바이올린 금지.” 나는 어디로 우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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