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3회: KBS 교향악단 광고 - 운명의 게시판
그리고 나는 고2로 들어섰다. 새로운 곡과 더 넓은 무대, 더 빽빽한 도면들. 여전히 연습 시간은 빡빡했고, 단체생활의 리듬은 엄격했다. 그래도 알았다. 하루 20분의 새벽과, 저녁 전 90분의 집중. 그 작은 조각들이 모여 결국 내 소리를 만든다는 것을. 그 소리로, 나는 다음 문을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생활관 복도 끝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액자 유리 안, 신문 하단 3분의 1을 통째로 차지한 검은 활자들이 먼저 눈에 박혔다. "국립 교향악단 KBS 산하 이관, 대대적 단원 모집." 정부의 전폭 지원, 군 면제, 우수한 처우, "대한민국 대표 오케스트라로 키우겠다." 같은 문장들이 굵은 활자로 이어졌다. 풀 냄새가 배어 있는 종이에서 잉크 냄새가 은근히 올라왔다. 그 순간, 막연했던 선이 갑자기 직선이 되었다.

'음대, 오케스트라.' 끝이 보이는 길.
그날부터 내 연습은 더 조밀해졌다. 정해진 특활 시간, 저녁 전 90분. 그 틈을 실처럼 끝까지 당겼다. 연습이 없을 때도 손가락은 책상 모서리 위에서 1, 2, 3, 4지를 옮겼고, 새벽엔 수녀님의 배려로 합주실 문이 20분 일찍 열렸다. 창이 막 밝아오는 그 시간, 튜닝 A를 길게 붙잡으면 빈 교실의 공기가 내 호흡 쪽으로 정리되는 걸 느꼈다.
목표가 생긴 뒤, 시간은 소모품이 아니라 연료가 되었다.
고2가 되면서, 다른 문이 '철컥' 닫혔다. 학교 방침. 공업고등학교의 목표는 기능사 자격 취득과 사회 진출. 음악대학 진학은 금기. 행정실의 단단한 목소리가 내 귀에 박혔다. "지금부터 바이올린은 금지."
금지의 첫날 밤, 입술이 말라 새벽에 입을 벌리지 못했다. 다음 날도 비슷했다. 이불 속에서 혀끝으로 피 맛이 났다. 연습실 문 앞에만 서 있어도, 걸레 짠 물의 비린 냄새와 송진 가루의 마른 냄새가 동시에 밀려왔고, 가슴이 거짓말처럼 아렸다. 그때 담당 수녀님이 조용히 내 옆에 섰다. "먼저 기능사 자격증 따자. 그 다음, 원장 수녀님께 네 얘기를 제대로 해보자."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방안의 공기를 바꾸는 제안이었다.
나는 실습실로 내려갔다. 제도판 위에 얇은 선을 긋고, 밀링 기계의 소리를 외웠다. 그러나 몸은 음악에 길들여져 있었고, 머리는 도면의 좌표를 오래 잡지 못했다. 1차 기능사 시험. 실격. 가슴이 툭 꺼졌다. 그날 밤, 나는 알았다. 이 학교 안에서 내가 음대로 가는 길은 너무 느리게 돌아간다는 걸.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검정고시. 내 길을 내가 만들자.
아버지를 떠올렸다. 금속공예 조각가, 종로 불교용품 가게들 사이에서 이름만 대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람.
다음 회차 예고|〈24회: 탈출 – 아버지의 작업실로〉
소등 뒤 검은 담요에 싼 바이올린, 계단의 네 번째 삐걱을 피한 발끝.
문이 열리면, 나는 한 글자만 말한다—“아버지.” 그 뒤의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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