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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24회: 탈출 - 아버지의 작업실로

by realstorybook 2025. 11. 7.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4회: 탈출 - 아버지의 작업실로

"그분 작업실이 어딘지 아세요?" 수소문이 길을 냈다. 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책과 공책 몇 권, 사인펜과 지우개, 그리고… 바이올린 한 대.


그 밤, 기숙사 소등 후 복도가 잠잠해졌을 때, 나는 케이스를 검은 담요로 감쌌다. 문고리를 감싸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돌리고, 발꿈치를 들었다. 계단의 네 번째 단에서 삐걱이 가장 컸고, 다섯 번째는 조용했다. 연습 때부터 알아 둔 사실. 정문 옆 경비실의 불빛은 노랗게 깜박였다.

 

 수녀님들의 묵주 소리가 멀리서 한 번 흔들렸다가 잦아들었다. 그 사이를 통과했다. 문밖 공기는 어두웠고, 자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케이스 손잡이가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는 내 쪽이었다. 내 생을 내 쪽으로 끌고 가는 감각.
종로. 향로 연기가 낮게 깔린 골목, 옻칠한 불단의 반짝임, 놋쇠 그릇이 내는 둔탁한 울림. "아, 그분? 저쪽 골목 끝, 2층 작업실." 사람들이 방향을 가리킬 때마다, 길이 구체적으로 생겼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 케이스를 바닥에 살짝 내려 놓고 손바닥 땀을 바지에 닦았다. 초인종 대신 낡은 나무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툭, 툭.
안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문이 열렸다. 작업대 위에는 반쯤 완성된 불상의 옆모습이 얌전히 번들거렸고, 금속 망치와 줄이 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문턱에 선 사람의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계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케이스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아버지."
긴 문장 대신, 한 글자의 온도가 방 안으로 번졌다. 그 온도만으로도, 나는 이 다음의 길을 말 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정고시, 음대, 그리고 게시판 유리 너머에서 처음 본 그 광고의 굵은 글자들까지. 내 목표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내 손엔 여전히 바이올린이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음악대학에 가고 싶어요.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해요. 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
망치질이 멈췄다. 작업대 위에 반쯤 완성된 불상이 빛을 수분처럼 얹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참 나를 보셨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던 시간들, 아버지의 눈동자에 그 해묵은 세월이 지나갔다가 멎었다

 

불상과 망치가 놓인 작업대에서 소년과 아버지가 눈을 맞추는 장면의 일러스트


"그래? 공부하겠다… 음악을 하겠다?"
고개가 아주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래, 학원비는 내가 댄다. 검정고시 준비해라."
그날부터 나는 낮엔 학원, 밤엔 바이올린이었다. 분필 가루가 가볍게 떠다니는 교실에서 기출문제를 풀고,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쳤다. 오래 비워 둔 공부 머리는 둔했지만, 손처럼 머리도 반복에 길들었다.

"그분 작업실이 어딘지 아세요?" 수소문이 길을 냈다. 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책과 공책 몇 권, 사인펜과 지우개, 그리고… 바이올린 한 대.


그 밤, 기숙사 소등 후 복도가 잠잠해졌을 때, 나는 케이스를 검은 담요로 감쌌다. 문고리를 감싸 잡아 소리가 나지 않게 돌리고, 발꿈치를 들었다. 계단의 네 번째 단에서 삐걱이 가장 컸고, 다섯 번째는 조용했다. 연습 때부터 알아 둔 사실. 정문 옆 경비실의 불빛은 노랗게 깜박였다. 수녀님들의 묵주 소리가 멀리서 한 번 흔들렸다가 잦아들었다.

 

 그 사이를 통과했다. 문밖 공기는 어두웠고, 자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케이스 손잡이가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는 내 쪽이었다. 내 생을 내 쪽으로 끌고 가는 감각.
종로. 향로 연기가 낮게 깔린 골목, 옻칠한 불단의 반짝임, 놋쇠 그릇이 내는 둔탁한 울림. "아, 그분? 저쪽 골목 끝, 2층 작업실." 사람들이 방향을 가리킬 때마다, 길이 구체적으로 생겼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 케이스를 바닥에 살짝 내려 놓고 손바닥 땀을 바지에 닦았다. 초인종 대신 낡은 나무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툭, 툭.
안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문이 열렸다. 작업대 위에는 반쯤 완성된 불상의 옆모습이 얌전히 번들거렸고, 금속 망치와 줄이 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문턱에 선 사람의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계모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케이스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아버지."
긴 문장 대신, 한 글자의 온도가 방 안으로 번졌다. 그 온도만으로도, 나는 이 다음의 길을 말 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정고시, 음대, 그리고 게시판 유리 너머에서 처음 본 그 광고의 굵은 글자들까지. 내 목표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내 손엔 여전히 바이올린이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음악대학에 가고 싶어요.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해요. 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
망치질이 멈췄다. 작업대 위에 반쯤 완성된 불상이 빛을 수분처럼 얹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참 나를 보셨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던 시간들, 아버지의 눈동자에 그 해묵은 세월이 지나갔다가 멎었다.


"그래? 공부하겠다… 음악을 하겠다?"
고개가 아주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래, 학원비는 내가 댄다. 검정고시 준비해라."
그날부터 나는 낮엔 학원, 밤엔 바이올린이었다. 분필 가루가 가볍게 떠다니는 교실에서 기출문제를 풀고,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쳤다. 오래 비워 둔 공부 머리는 둔했지만, 손처럼 머리도 반복에 길들었다.

 

다음 회차 예고|〈25회: 검정고시 합격 – 새로운 시작〉
버스에선 노트, 밤엔 —나만의 종이 울린다.
잉크 냄새와 송진 냄새가 겹친 시험날, 내 이름은 어디에 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