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5회: 검정고시 합격 - 새로운 시작
버스 안에서는 노트를 외웠고, 집에 돌아오면 활을 들었다. 종이 울리는 삶에서 벗어났지만, 나는 나만의 종을 만들었다. 오전 두 시간, 국어와 수학. 오후 한 시간, 영어. 저녁, 활.

시험 날, 교실에 퍼진 잉크 냄새와 연필심 냄새가 이상하게도 합주실의 송진 냄새를 닮아 있었다. 나는 책상 모서리에 손을 붙이고 문제지를 넘겼다.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며칠 후,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았을 때 손끝이 먼저 떨렸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 합격.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허공에 활을 그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몸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
이제 남은 건 음악. 하지만 레슨이 문제였다. 집 형편을 생각하면 아버지께 더 부탁하기가 미안했다. 그때는 입시를 체계적으로 봐 주는 바이올린 입시 학원도 거의 없었다. 나는 혼자 연습했고, 카세트테이프에 내 연주를 녹음해 들었다. 듣고 고치고, 또 녹음했다. 중고 레코드점에서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테이프를 사서 닳도록 들었다. 활이 어디서 가벼워지는지, 비브라토가 어디서 더 얕아지는지, 소리의 '턱'을 찾는 공부를 귀로 했다.
부산에 계신 옛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한양대 첼로 교수님 아는 분이 있어. 연결해 볼게." 숨통이 트였다. 나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원서를 냈다. 연습은 더 빡빡해졌다. 새벽엔 개방현으로 몸을 깨우고, 한낮엔 곡의 한 문장을 한 시간씩 붙들었다. 손가락 끝이 단단해지고, 보잉의 숨이 한결 길어졌다.
실기 시험 날. 교내 복도는 A음 튜닝으로 가볍게 떨리고, 대기실에서는 악보 넘기는 소리가 종잇장처럼 얇게 겹쳤다. 내 차례가 불렸다. 피아노와 눈짓을 맞추고 첫 음을 눌렀다. 첫 마디가 지나가자 손이 조금 가벼워졌다. 마지막 음이 홀 안에서 둥글게 사라질 때까지 활을 끝까지 지켜 보냈다. 커튼을 젖히고 나오는데, 복도 끝에서 한 교수님이 서 계셨다.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다 학교로 오셨다는 분. 내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짧게 말했다. "학교 들어오면, 내가 가르치게 될 거야." 그 말이 내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혹시… 합격?'
발표일, 운동장 벽면에 붙은 하얀 종이들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나는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한 줄씩 천천히 내려갔다. 내 이름. 분명히 있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옆쪽 종이를 더듬듯 옮겼다. 장학생 명단. 거기에도 내 이름이 있었다. 학비 면제. 종이의 모서리가 또렷하게 손바닥을 찔렀다.
아픈데 달콤한 감각.
나는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동전을 밀어 넣고, 숫자를 천천히 눌렀다.
"아버지… 합격했어요. 저, 장학생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잠깐의 정적, 그리고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
"그래, 수고했다. 집에 와서 밥 먹자."
다음 회차 예고|〈26회: 대학 1학년 – 낯선 세상〉
장학생 합격 전화 뒤, 캠퍼스의 첫 걸음과 낯선 말의 속도.
88‒89점이 남긴 신호—나는 어떻게 소리의 밑바닥부터 다시 세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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