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6회: 대학 1학년 - 낯선 세상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세상이 한 톤 밝아졌다.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 하늘의 색, 사람들의 발소리까지도 더 또렷했다. 나는 마음속에서 오래 접어 둔 종이를 펼치듯, 다음 문장을 읽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그날 밤, 케이스를 열고 첫 음을 길게 그었다. 라. 그 한 음 위에 나는 내 지난 시간을, 그리고 다음 시간을 차분히 올려놓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이, 또 한 번,

1984년 3월 초,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얇았다. 입학식을 마치고 첫 수업을 들으러 음악대학 언덕을 오를 때, 운동화 밑창이 계단을 가볍게 긁었다. 교정엔 새 연필 냄새와 바이올린 케이스의 울 냄새, 광을 낸 복도 바닥의 왁스 냄새가 겹쳐 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 한 문장이 발걸음을 밀었다.
강의실 앞에서 동기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이름을 묻고, 어디서 왔는지 묻고, 누군가는 농담을 던졌다. 웃음이 번졌다.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저게 웃긴가? 말끝의 뉘앙스를 놓치고, 대화의 속도를 놓쳤다. 그 어색함이 오래가진 않았다. 금세 이유를 알았다. 성장해야 할 시간에 나는 벽을 보며 버티는 법부터 배웠다.
계모의 손, 도망과 숨김, 아동보호소와 소년의 집의 닫힌 규칙. 그곳에서 통용된 말과 리듬이 내 언어의 범위를 좁혀 놓았던 것이다. 바깥 세상의 속기와 비유, '당연함'의 속도가 내겐 낯설었다.
대신 내겐 다른 근육이 있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 활 하나로 내 자리를 지을 수 있는 것. 바이올린. 그 강점 하나로 나는 버텼고, 늘 1등을 했다. 그런데 대학 1학년의 '실기'는 달랐다. 학기 말 점수는 A가 아니었다. 88점, 89점. 늘어놓고 보면 좋은 점수지만, 내게는 분명한 신호였다. '뭐가 문제지?'
방학 내내 나는 소리의 밑바닥부터 뒤집어 보았다. 내 소리는 안정되지 않았고, 음정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갔다. 개방현을 길게, 호흡을 다 써서 끝까지, 붙잡았고, 느린 장음계로 손가락을 다시 세웠다. 활의 무게가 어디서 새는지, 손목이 어느 지점에서 굳는지, 왼손 엄지가 언제 긴장을 올리는지. 느리게, 더 느리게. 한 음을 제대로 만들고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연습. 하루의 절반을 그렇게 보냈다. 때로는 피아노 A에 맞춰 오래 머물렀고, 때로는 거울 앞에서 활각만 확인했다. '좋은 소리'라는 말이 실감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자, 실기 평점이 드디어 A로 올라섰다. 어떤 날은 점수표보다 더 먼저 알 수 있었다. 첫 음을 긋는 순간, 활이 미끄러지지 않고 소리가 몸 안쪽으로 곧게 들어오는 감각. 그게 있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대학의 첫해는, 악보를 배우는 해가 아니라 내 안의 불안과 말을 맞추는 해였다는 것을.
다음 회차 예고|〈27회: 실내악과 사랑 – 샌드위치의 온기〉
새벽 7시 실내악 첫 연습—피아노의 ‘라’, 첼로의 바닥, 그리고 셋의 호흡.
한 조각 샌드위치의 온기와 함께, 내 소리와 마음은 어디로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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