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자전적 소설] - 방 한 칸의 밤 - 1960년대 후반
2회:방 한 칸의 밤 - 1960년대 후반
2회: 방 한 칸의 밤 - 1960년대 후반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밤이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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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여동생의 실종 - 지워진 얼굴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시계는 움직이는 것처럼 굴었지만, 시간은 한 자리에 붙들려 있었다. 계모의 숨이 거칠게 들리다가, 어느 순간 툭 끊겼다. 기척은 사라졌다. 남은 건 여동생의 얇은 숨, 형의 오돌오돌 떨리는 무릎, 그리고 내 손등에 남은 이빨자국뿐.
얼마나 지났을까. 등잔불이 꺼질 듯 말 듯 작은 원을 그렸다. 나는 몸을 풀어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이름은 무언가를 불러들이는 주문 같아서, 더 큰 불행을 소환할까 두려웠다. 대신 곁에 떨어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손수건이 손보다 더 떨렸다. 형이 속삭였다. "쉬…." 그 말엔 가만히 있으라는 뜻, 울지 말라는 뜻,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 다 실려 있었다.

그 밤 이후, 나는 여동생의 얼굴을 또렷이 떠올릴 수 없다. 사람의 얼굴은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가. 웃음소리, 잠들 때 몸을 어느 쪽으로 말았는지, 젓가락을 어느 손에 쥐었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기억은 사건을 선명하게 남기고, 사람을 지워버렸다. 훗날 어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문은 늘 비슷했다. 어디론가 팔려갔다더라. '어디'는 아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말끝은 흐려지고,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바닥엔 연탄재와 오래된 얼룩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낮이 오면, 나는 종로의 시장을 지나며 밤의 방을 의심했다. 구두닦이 소년의 외침, 포장마차의 지글거림, 양은솥의 김, 밀가루 포대를 재활용한 쌀자루 위에서 하품하는 개. 햇빛은 분명했고, 사람들은 분주했다. 그 빛 속에서 밤은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하지만 해가 기울면 답은 매번 같았다. 밤은 낮의 것들을 하나씩 지우고, 우리 방은 제 얼굴을 되찾았다. 우리는 다시 조심스러워졌고, 말끝을 줄였고, 움직임을 접었다.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나는 문장 하나로 그 시절을 묶는다. 우리는 그 밤을 지나왔다. 지나왔다는 건 버텼다는 뜻이면서, 무엇을 영영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름을 부르지 못한 밤, 우리는 소리 없는 증인이었다. 증인은 때로 가장 오래 벌을 받는다.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돌처럼 굳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쓰는 일은 돌을 깎는 일과 닮았다. 한 획씩 깎아내다 보면, 오래전 작은 숨결 하나가 돌 안에서 더듬거리며 나온다.
여동생의 얼굴을 나는 끝내 정확히 다시 그리지 못한다. 대신 그 밤의 조각들을 붙든다. 조그마한 손등, 구겨진 치맛단, 형의 움켜쥔 주먹, 떨리던 등잔, 문틈의 바람 온도, 쇠 맛이 배인 손수건.
4화에서 밝혀집니다.
연필 하나가 왜 아이의 고개를 숙이게 했을까?
나는 어떻게 눈치 먼저, 소망은 나중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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