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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담벼락 밖의 아이 - 결석의 날들

📑 목차

    [자전적 소설] - 4회: 연필 하나의 무게 - 초등학교 1학년

     

    4회: 연필 하나의 무게 - 초등학교 1학년

    4회: 연필 하나의 무게 - 초등학교 1학년 1970년대 초, 초등학교 1학년 봄 아침이었다. 교문 쪽에서 종소리가 한 번 울리고, 운동장 모래가 얇게 떠올랐다. 나는 그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길을 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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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5회: 담벼락 밖의 아이 - 결석의 날들

    육성회비를 걷는 날이면, 나는 교문을 지나지 않았다. 학교 담벼락이 한쪽 볼을 내주는 곳에 서서, 책가방을 등 뒤로 돌려 숨긴 채 종소리를 세었다. 

    담벼락 밖에서 종소리를 세던 아이 (수채화·연출)

    첫 시간 종, 쉬는 시간 종, 두 번째 시간 종. 아이들이 달리는 구두밑창의 소리가 먼지와 함께 흔들렸다. 나는 벽돌의 거친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굳이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가 생긴 날들. 그날들의 빛은 유난히 밝았고, 그림자는 얇았다. 수업이 모두 끝나갈 즈음, 운동장 구령대 옆에서 마지막 종이 울리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집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내 또래가 내는 발소리와 똑같아야 했다. 똑같아 보이는 게 안전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건 오래 숨지 못했다. 어느 날, 담임의 말이 돌아 돌아 계모의 귀에 들어갔다. "얘가 결석을…." 이유는 묻지 않았다. 다짜고짜 손과 발이 먼저였다. 그날도 나는 울지 못했다. 울음은 언제나 금지된 소리였고, 대신 방 안의 물건들이 울었다. 찬장 문짝이 낡은 경첩으로 울고, 비닐장판이 발뒤꿈치 아래서 울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숨소리뿐이었다. 숨은 얇고 길게, 쪼개져 나왔다.


    학교는, 그리고 동네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갔다. 매점 앞에서는 어머니들이 우유병 뚜껑을 따고, 골목 입구에서는 참기름집의 쇠절구가 둔탁한 리듬을 찍었다. 광목천을 내건 가게 앞에는 빛이 쏟아졌고, 그 빛을 통과한 먼지가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내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자꾸만 벽 쪽으로 몸을 종이처럼 접었다. 접고 또 접다 보면, 언젠가 주머니 속에서도 잃어버릴 수 있는 크기가 될 것 같아서.


    그 무렵의 나는, 배운 적 없는 계산을 했다. "오늘은 월초, 육성회비, 담임의 눈, 결석, 집, 손." 머릿속에서 화살표들이 저절로 그어졌다. 그 화살표는 언제나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나를 향해. 그 길 위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고, 작아진 만큼 눈치는 더 커졌다. 누가 나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누가 화를 내기 전에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문장들이 바뀌었다. "해주세요"보다 "괜찮아요"가 먼저 나왔다. "갖고 싶어요"보다 "필요 없어요"가 먼저 나왔다.
    그래도 기억 속에는 한 줄기의 다른 빛이 남아 있다. 누나의 손등. 그날, 내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 누나는 말없이 부엌 찬장의 빈 연필깎이를 열어 보여주었다. 안에는 짧아서 잡히지 않는 몽당연필이 두어 자루 있었다. 누나는 그것들을 모아 종이에 싸서 내 손에 쥐여줬다. "다음엔 나한테 먼저 얘기해." 그 말은 작았지만 오래 남았다.

     

    다음 회차 예고|〈6화: 도망과 화상〉
    골목의 바람과 방 안의 쇠 냄새가 만나는 지점.
    도망의 끝에 남은 소리를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