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30회: 합격 - 1988년 3월, 인생 최고의 순간
저녁엔 오케스트라 발췌곡. 부드러운 레가토 뒤의 날카로운 어택, 목관과의 숨 맞춤, 팀파니와의 입맞춤. 소리는 하나의 몸이 되어야 했다. 나는 소리가 '나'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모차르트 1악장 도입부에서 활이 스스로 길을 택하는 느낌을 받았다. 손이 아닌 등으로 긋는 감각. 그때 어쩐지 "됐다"는 생각이 아주 작은 불씨처럼 켜졌다.
1988년 3월, 오디션 날 아침은 유리처럼 맑고 차가웠다. 나는 손끝이 얼어붙지 않게 주머니 속에서 활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KBS 방송국으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대리석 바닥이 낮게 울리고, 천장 높은 로비가 사람의 목소리를 작게 만들었다.

대기실. 명문 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농담을 던지고, A음을 길게 붙잡았다. 나는 마지막 순번. 의자 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내 성격은 이런 자리에서 늘 제일 먼저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한 팀이 들어가고, 또 한 팀이 나왔다. 대기실이 드문드문 비어갈 때쯤, 나는 그제야 케이스를 열었다.
내 순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심사위원석 앞에 열 명 남짓이 앉아 있었다. 피아노 옆, 악보대 앞. "지정곡 ○○, 시작하세요." 첫 음을 긋는 순간,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활이 줄을 스치며 가던 궤도가 흔들리고, 소리는 반음쯤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금 아니야, 지금.' 마음이 더 빨라졌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분. 누구나 아는 그 지휘자. 가 조용히 다가와 아주 낮게 말했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듯 해요. 차분히. 지금, 여기 혼자라고 생각해요."
목소리는 따뜻하고 단정했다. 그 한 문장이 내 어깨에서 불필요한 힘을 빼내는 걸, 나는 분명히 느꼈다.
다시 활을 올렸다. 이번엔 A가 내 호흡 길이에 맞춰 곧게 섰다. 프레이즈의 앞모서리를 얇게 깎고, 비브라토의 폭을 절반으로 줄였다. 발췌곡에선 스피카토의 낙차를 메트로놈이 아니라 내 등줄기로 맞췄다. 조명이 이마를 가볍게 덮고, 소리는 한 걸음 앞에 자리를 만들었다. 마지막 음을 끝까지 지켜 보내고, 나는 천천히 활을 내렸다.
발표는 일주일 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안심과 불안이 번갈아가며 맥박을 쳤다. 그 일주일이 왜 그렇게 길었던지. 벽시계의 초침이 메트로놈 소리처럼 또렷했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목울대를 긁는 질문을 매일 몇 번씩 삼켰다.
발표날,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말했다.
"유승구 씨, 합격입니다."
그 순간, 무릎이 약해지고, 방 안의 색이 한 톤 밝아졌다. '바이올린 3명 선발.' 그 안에 내 이름. 오래 묵었던 한 문장이 드디어 끝마침표를 찍었다. 고등학교 생활관 게시판에서 'KBS 교향악단'이라는 굵은 활자를 처음 보았던 날부터, 코앞까지 달려와 찍은 마침표.
다음 회차 예고|〈31회: 에필로그 – 그 후의 삶〉
“합격입니다.” 그 한마디 뒤에 이어진 무대·유학·가르침의 시간들.
한 줄의 통보가 어떻게 삶 전체의 페이지를 넘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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