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에필로그 - 그 후의 삶
그 뒤의 시간들은 빠르고 분명했다. KBS 교향악단에서 3년, 무대의 규율과 직업의 호흡을 몸으로 새겼다. 독일로 유학, Dortmund국립음대 졸업, 귀국. 부산에 정착해 귀국 독주회를 열고, 여러 지방 시립교향악단에서 악장으로 섰다. 예술중, 고,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언젠가 내가 건네받았던 한마디의 온기를, 내 말로 다시 건넸다. KBS에 있던 동안 결혼도 했고, 유학 후엔 아이 둘을 품에 안았다.

영광의 무대들이 뒤이어 찾아왔지만, 내게 최고의 순간을 하나만 꼽으라면 여전히 그 전화다. "합격입니다." 그 말 한 줄이 내 삶의 페이지를 통째로 넘겼다.
지금 돌이키면, 그날까지의 내 어깨엔 많은 손길이 얹혀 있었다. 손에 맞는 악기를 빌려준 후배, "오디션 때 이걸 쓰라"며 케이스를 내밀던 스승, 새벽 20분을 열어준 수녀님, 불 꺼지기 직전 문을 잡아주던 경비 아저씨. 나는 혼자 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이 함께 걸었다.
스물일곱. 여섯, 일곱 살의 어둠, 초등학교의 결석과 담장, 부랑의 밤, 아동보호소 대기통, 소년의 집의 종소리, 합주부의 튜닝 A, 검정고시의 잉크 냄새, 장학생이라는 세 글자, 대학의 악장석, 그리고 오늘의 합격. 나는 그 모든 밤과 아침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꺾이지 않으려 애쓴 시간들이 내 안에서 소리로 바뀌었다.
그날 저녁, 케이스를 열고 첫 음을 길게 그었다. 라. 그 한 음 위에 나는 내 지난 시간을, 그리고 다음 시간을 차분히 올려놓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이, 또 한 번.
그 후 KBS 교향악단 생활을 3년 했다. 독일로 유학을 갔다. 국립음대를 졸업했다. 귀국해서 부산에 정착했다. 귀국 독주회를 열었다. 여러 지방 시립교향악단의 악장으로 활동했다. 예술중고등학교와 음악대학에서 강사로도 일했다. KBS 교향악단 생활 중 결혼했다. 유학 후에는 아이 둘을 품었다. 유학 이후에도 좋은 순간들,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역시 그때였다."유승구씨, 합격입니다."
그 한마디를 들었던 1988년 3월의 그날.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삶이었다. 계모의 폭력, 고아원의 철창, 친모의 냉대.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려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이올린이 있었다.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다. 고비마다 나타난 은인들이 있었다. 샌드위치를 싸온 여자친구, 악기를 빌려준 후배, 오디션 때 따뜻한 말을 건넨 지휘자, 나를 끝까지 가르쳐주신 교수님. 그들의 작은 도움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들었다.
이제 나는 안다. 성공이란 화려한 무대 위의 박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이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고, 한 음 한 음 정성껏 쌓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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