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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29회: 이별과 재기 - KBS 오디션 준비

by realstorybook 2025. 11. 8.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9회: 이별과 재기 - KBS 오디션 준비

4학년이 끝나가던 늦가을, 교정의 은행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던 날이었다. 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미안해." 두 글자 이후의 문장들은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벤치 옆 낙엽이 바스락거렸고, 멀리서 관악 합주가 스케일을 올렸다 내렸다. 나는 알았다. 내가 잡고 있던 몇 개의 선, 연습과 생활과 사랑으로 이어진 선들 중 하나가 조용히 끊어졌다는 것을.


그날 밤, 합주실 문손잡이가 유난히 차가웠다. 활털을 조이며 스크루를 돌리는 손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왜 3학년 때처럼 흐트러졌나." 후회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따뜻했지만, 그만큼 내 연습은 얇아졌었다. 늦게라도 나는 내 페이스를 되찾아야 했다. 아니, 되찾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뛰어넘어야 했다.


나는 오디션을 목전에 둔 사람의 시간표로 들어갔다. 아침 7시, 장음계, 크로매틱, 개방현을 10분, 활의 속도와 압력만으로 소리의 중심을 잡기. 오전, 헨델, 모차르트 협주곡 1악장 노트-바이-노트 정리, 인트로네이션 고정. 오후, 오케스트라 발췌곡: 피치카토 길이, 스피카토의 탄력, 리듬의 내부 박 나누기. 해가 기울면, 거울 앞 보잉 각도만 20분, 손목과 팔꿈치의 각을 1도씩 교정. 한 번 들어간 연습실에서 나오기까지 다섯 시간. 물병의 절반이 비고 나서야 비로소 문밖 공기를 마셨다.

문제는 악기였다. 어느 밤, 큰 홀을 빌려 '무대 소리'를 점검하다가 절벽 같은 한계를 봤다.

“빈 콘서트홀에서 소리의 한계를 느끼는 바이올리니스트”

 

소리는 내 범위를 조금 넘기 시작하면 금세 앞에서 꺼지고 뒤로는 멀리 뻗지 못했다.

나는오래 모아 산 '나름의 좋은 악기'를 쓰고 있었지만, 프로 무대의 요구는 그보다 한참 높았다. 그 사실이 뼈에 닿았다.
그때 후배가 다가왔다. "선배, 제 악기가 조금 나을 거예요. 오디션까지 쓰세요." 케이스를 열자, 바니시가 오래된 꿀빛으로 번졌다. 활을 얹어 한 줄을 그었을 때, 소리는 내 귀 옆에서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 더 나갔다. "고맙다. 정말." 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며칠 뒤, 담당 교수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이걸 써라. 오디션 날까지." 케이스가 묵직했다. 악기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나무의 밀도가 손바닥을 눌렀다. 첫 음. 미세한 비브라토를 얹어 길게 붙들자, 소리는 '좋다'를 넘어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작은 홀이든 큰 홀이든, 앞열보다 세 번째 줄쯤에 정확히 내려앉는 소리.


"연습 열심히 하고, 꼭 붙어라."
그 말은 분명 명령이었지만, 내겐 축복처럼 들렸다.
나는 다시 시간을 모아 썼다. 오전엔 모차르트의 프레이즈에서 포르타토의 길이를 분, 초 단위로 재고, 점심 뒤엔 베토벤의 스피카토를 메트로놈 한 칸씩 올리며 탄력의 임계점을 찾았다.

다음 회차 예고|〈30회: 합격 – 1988년 3월, 인생 최고의 순간〉
유리처럼 맑은 오디션 아침, 마지막 순번의 떨림—활은 어디로 갈까?
한 지휘자의 한마디, “집에서 혼자 연습하듯”… 그 뒤 소리는 어디까지 나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