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7회: 실내악과 사랑 - 샌드위치의 온기
세상 말의 속도를 아직 다 따라잡지 못해도, 한 음의 속도를 내 호흡에 맞추는 법은 배웠다. 그 한 음이 쌓여 내 두 번째 해의 문이 열렸다.
대학 3학년, 실내악 수업 공지가 붙던 날의 공기는 유난히 얇았다. 우리는 셋이 모였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편성만 정하면 되는 일인데, 셋이 마주 앉아 첫 악보를 펼치는 순간, 종이에서 묵은 잉크 냄새가 올라와 '우리가 팀이구나' 하는 사실이 베개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연습은 자율, 레슨은 주 1회. 나는 낮 시간을 온전히 개인 연습으로 남겨 두고 싶어 말했다. "아침 일곱 시에 학교에서 보자."
문지기 아저씨가 열쇠를 돌리는 시간보다 더 일찍, 우리 셋은 얼어 있는 금속 손잡이를 함께 잡아 돌렸다. 차가운 공기가 연습실 바닥을 스치고, 피아노 뚜껑을 드는 힘줄이 얇게 도드라졌다. 활털에 송진을 문지르면 하얀 가루가 손등에 가볍게 앉았다. 그때의 침묵은, 음을 기다리는 낮은 숨 같았다.
튜닝 A. 피아노의 '라'가 공기 속으로 곧게 뻗고, 첼로가 그 아래서 바닥을 깔았다. 나는 활끝을 조금 더 낮추고, 맨 처음의 음을 길게 붙들었다. 음 하나가 균형을 찾는 동안, 창문 밖 하늘은 어둔 파랑에서 희끗한 회색으로 옮겨갔다.
어느 날, 피아노 치는 그녀가 작은 보온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연습 전에 샌드위치부터 먹자.

" 랩을 풀자 토스트의 미지근한 온기와 삶은 달걀의 마른 향, 오이의 서늘한 냄새가 겹쳐 올라왔다. 나는 뜻밖에 목이 메었다. 늘 혼자 허둥지둥 해결하던 끼니, 굶던 밤들이 그 한 조각 빵 위에서 조용히 자리를 바꿨다. "고마워." 그 말이 너무 작게 나와,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그녀는 "이따 3단에서 타이밍 한번만 맞춰 보자" 하고 웃었다.
연습은 오밀조밀해졌다. 첼로의 활이 2마디 앞에서 호흡을 던지면, 우리는 그 호흡을 받아 빈틈 없이 맞물렸다. 그녀의 페달은 한 박자 뒤에서 가볍게 올라오고, 내 보잉은 그 틈에 발목처럼 얹혔다. "여기, 악보에는 피아노인데 우리끼린 메조로 맞출까?" 그녀가 물으면, 우리는 눈짓으로 '응'을 건넸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정확히 말하면 샌드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곡의 중간에 내가 미세하게 속도를 앞서면 "조금, 아주 조금만 뒤로"라고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간격을 보여 주던 그 몸짓. 악상을 설명할 때 말보다 먼저 웃던 눈. 내가 얇게 흔들리는 날에는 "오늘은 A를 좀 더 오래 붙들자"라며, 소리의 기초부터 다시 세우자고 제안하던 그 단단함.
나는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청했다. 그녀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내 연습 노트의 빈칸은 종종 커피 얼룩으로 채워졌다.행복은 조용하고, 정확했다. 연습을 마치고 강의 사이 복도 난간에 기대 이야기하고, 저녁이면 캠퍼스 끝자락을 걸었다.
다음 회차 예고|〈28회: 4학년 악장 – 오케스트라의 중심〉
‘나’의 연습에서 ‘우리’의 악보로—나는 왜 악장을 망설였고, 어떻게 중심에 서게 될까?
오보에의 A가 홀의 오늘 온도를 정하고, 한 손짓이 여러 소리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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