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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28회: 4학년 악장 - 오케스트라의 중심

by realstorybook 2025. 11. 8.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8회: 4학년 악장 - 오케스트라의 중심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얇게 둘렀고, 나는 괜히 활 쥐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활을 쥐던 시간이, 어느새 그녀의 손을 잡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연습장 한 켠 내 자리엔 먼지가 조금 더 쉬이 앉았다.


담당 교수님은 금방 알아차렸다. "요즘, 연습이 예전 같지 않네." 말은 가벼웠지만 눈빛은 정확했다. 나는 "네, 다시 속도를 찾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 한편에서 얇은 죄책감과 얇은 기쁨이 함께 흔들렸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었다.


4학년을 마치고 4학년이 되자, 같은 오케스트라 수업이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악장을 뽑는 해였다. 전통처럼, 늘 바이올린 수석이 맡아 오던 자리. 이름이 내게로 왔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연습 시간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내 전공곡 한 마디라도 더 붙들고 싶었다. 전공 선생님은 잠깐 내 눈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해라. 그 자리는 네 귀를 넓혀 줄 거야. 네 손만이 아니라 네 등을, 네 숨을 키울 거다."


그 말에 등을 살짝 떠밀린 기분으로, 나는 악장을 맡았다.
첫 과제는 악보를 '나'가 아니라 '우리'로 읽는 법이었다.

 

“악장이 풀스코어에 파트 흐름을 메모하며 분석하는 장면”

 개인 곡 연습처럼 프레이즈를 안쪽으로 다듬는 대신, 풀스코어를 펼쳐 목관의 호흡이 어디에서 시작해 금관으로 어떻게 넘어오는지, 팀파니가 어느 지점에서 바닥을 들어 올리는지, 현악의 색을 어디까지 얇게 빼야 목관의 선이 살고, 어디서 조금 두껍게 칠해야 금관과 맞먹을 수 있는지.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말을 처음 이해했다.


리허설 날, 지휘자가 입장하기 전 나는 일어서서 무대 중앙을 한 번 훑었다. 관악 쪽을 향해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로 신호를 준 뒤 오른손을 들어 튜닝 A를 청했다. 오보에의 '라'가 홀 안을 곧게 그으면, 바이올린이, 비올라가, 첼로가, 콘트라베이스가 차례로 그 위에 맞춰 앉았다. '오늘의 온도'를 그 한 음으로 정하는 일. 처음엔 그 작은 제스처가 어색했지만, 곧 책임감이 붙었다.


지휘자의 박이 리허설 마크 C를 지날 때 나는 오른손 검지로 살짝 박을 세웠고, 2바 뒤 목관이 들어올 타이밍에 왼쪽 눈썹을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내 손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내 손짓 하나가 여럿의 소리를 만든다는 사실이 몸으로 와 닿았다.
정기연주회 무대에서 콘서트마스터 솔로를 서는 순간, 홀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조명이 이마를 따뜻하게 눌렀고, 현이 내 손끝의 무게를 따라 길게 떨었다. 그 짧은 선율이 끝날 때, 나는 활을 끝까지 지켜 보냈다. 뒤돌아 서서 지휘자를 마주 보는 단 1초. '연결'의 직업을 내 몸에 새기는 1초였다.


한 해가 끝날 즈음, 내 노트엔 전공곡의 활기호 옆에 리허설 마크, 관악 큐, 보잉 결정 이유 같은 메모가 빽빽했다. 음악은 더 크고 넓어졌고, 나는 그 넓이만큼 작아졌다. 좋은 의미로. 합 속의 한 사람으로.

 

다음 회차 예고|〈29회: 이별과 재기 – KBS 오디션 준비〉
늦가을 이별 뒤, 나는 오디션의 시간표로 들어간다.
악기 한계 앞에서 멈춘 소리—누구의 손 내밀음이 내 소리를 다시 앞으로 보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