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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의 삶 & 에세이31

31회: 에필로그 - 그 후의 삶 ← 이전화 ">← 이전화 31회: 에필로그 - 그 후의 삶 뒤의 시간들은 빠르고 분명했다. KBS 교향악단에서 3년, 무대의 규율과 직업의 호흡을 몸으로 새겼다. 독일로 유학, Dortmund국립음대 졸업, 귀국. 부산에 정착해 귀국 독주회를 열고, 여러 지방 시립교향악단에서 악장으로 섰다. 예술중, 고,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언젠가 내가 건네받았던 한마디의 온기를, 내 말로 다시 건넸다. KBS에 있던 동안 결혼도 했고, 유학 후엔 아이 둘을 품에 안았다. 유학 이후에도 좋은 순간들,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있었다.하지만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역시 그때였다."유승구씨, 합격입니다."그 한마디를 들었던 1988년 3월의 그날.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삶이었다. 계모의 폭력, 고아원의 철창, .. 2025. 11. 9.
30회: 합격 - 1988년 3월, 인생 최고의 순간 ← 이전화 다음화 →">← 이전화 다음화 →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30회: 합격 - 1988년 3월, 인생 최고의 순간 저녁엔 오케스트라 발췌곡. 부드러운 레가토 뒤의 날카로운 어택, 목관과의 숨 맞춤, 팀파니와의 입맞춤. 소리는 하나의 몸이 되어야 했다. 나는 소리가 '나'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모차르트 1악장 도입부에서 활이 스스로 길을 택하는 느낌을 받았다. 손이 아닌 등으로 긋는 감각. 그때 어쩐지 "됐다"는 생각이 아주 작은 불씨처럼 켜졌다.1988년 3월, 오디션 날 아침은 유리처럼 맑고 차가웠다. 나는 손끝이 얼어붙지 않게 주머니 속에서 활을 몇 .. 2025. 11. 9.
29회: 이별과 재기 - KBS 오디션 준비 ← 이전화 다음화 →">← 이전화 다음화 →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9회: 이별과 재기 - KBS 오디션 준비 4학년이 끝나가던 늦가을, 교정의 은행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던 날이었다. 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미안해." 두 글자 이후의 문장들은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벤치 옆 낙엽이 바스락거렸고, 멀리서 관악 합주가 스케일을 올렸다 내렸다. 나는 알았다. 내가 잡고 있던 몇 개의 선, 연습과 생활과 사랑으로 이어진 선들 중 하나가 조용히 끊어졌다는 것을.그날 밤, 합주실 문손잡이가 유난히 차가웠다. 활털을 조이며 스크루를 돌리는 손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 2025. 11. 8.
28회: 4학년 악장 - 오케스트라의 중심 ← 이전화 다음화 →">← 이전화 다음화 →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8회: 4학년 악장 - 오케스트라의 중심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얇게 둘렀고, 나는 괜히 활 쥐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활을 쥐던 시간이, 어느새 그녀의 손을 잡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연습장 한 켠 내 자리엔 먼지가 조금 더 쉬이 앉았다.담당 교수님은 금방 알아차렸다. "요즘, 연습이 예전 같지 않네." 말은 가벼웠지만 눈빛은 정확했다. 나는 "네, 다시 속도를 찾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 한편에서 얇은 죄책감과 얇은 기쁨이 함께 흔들렸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었다.4학년.. 2025. 11. 8.
27회: 실내악과 사랑 - 샌드위치의 온기 ← 이전화 다음화 →">← 이전화 다음화 →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7회: 실내악과 사랑 - 샌드위치의 온기 세상 말의 속도를 아직 다 따라잡지 못해도, 한 음의 속도를 내 호흡에 맞추는 법은 배웠다. 그 한 음이 쌓여 내 두 번째 해의 문이 열렸다.대학 3학년, 실내악 수업 공지가 붙던 날의 공기는 유난히 얇았다. 우리는 셋이 모였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편성만 정하면 되는 일인데, 셋이 마주 앉아 첫 악보를 펼치는 순간, 종이에서 묵은 잉크 냄새가 올라와 '우리가 팀이구나' 하는 사실이 베개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연습은 자율, 레슨은 주 1회. 나는 낮 시간을 온전히 .. 2025. 11. 8.
26회: 대학 1학년 - 낯선 세상 ← 이전화 다음화 →">← 이전화 다음화 → ※ 이 글에는 과거의 가정폭력/학대 경험에 대한 간접적 묘사가 포함됩니다. 노골적·상세한 표현은 지양합니다. 불편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26회: 대학 1학년 - 낯선 세상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세상이 한 톤 밝아졌다.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 하늘의 색, 사람들의 발소리까지도 더 또렷했다. 나는 마음속에서 오래 접어 둔 종이를 펼치듯, 다음 문장을 읽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그날 밤, 케이스를 열고 첫 음을 길게 그었다. 라. 그 한 음 위에 나는 내 지난 시간을, 그리고 다음 시간을 차분히 올려놓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이었지만, 오늘은 새로이, 또 한 번, 1984년 3월 초,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얇았다. 입학식을 마치고.. 2025. 11. 7.